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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게 간소하게(기독교보.시론.201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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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4-01-16 15:59 조회2,9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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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하게 간소하게(기독교보.시론.2014.1.18)

황수섭 목사(고신대학교 의과대학 교목)

국제사회는 물론, 우리 사회의 화두도 경제이다. 경제성장, 경제개발, 경제활성화, 경제회복, 1만달러 2만달러 3만달러 드뎌 4만달러를 이루겠단다. 구호처럼 경제 발전과 소득 증대를 이루었지만 자족하고 행복감을 가지는 사람은 소수이다. 사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 역사 이래 지금 이 시대 우리 만큼 호사를 누리며 편리함이 증진된 시대가 있었던가. 그러나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며 좌절하는 이도 있다.
왜 그럴까? ‘풍년 거지가 더 서럽다.’는 말처럼 상대적인 빈곤감이 크기 때문이다. 과도한 소득 불균형과 빈부 격차는 현대 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완전히 해결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해지는” 말세의 현상(딤후 3장)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액수의 연봉이나 고액의 보너스에 갈증을 느끼고 영리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 있는 한, 복지나 경제에 관한 정책, 구호만으로는 경제적인 만족을 누릴 수 없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경제정의 실현” 등 거창한 구호도 좋지만 작은 일에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소비 고비용의 물결에 빠져 들어 허우적 거리고 있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도 없고 행복지수도 낮아지고 있다.
그럴수록 근면, 검소, 절약하는 생활을 하고, 허례허식을 과감히 버리자.
먼저 교회가 주관하는 행사의 규모를 과감하게 축소하자.
교회의 크고 작은 행사에 등장하는 화환과 주고 받는 선물, 답례를 줄이고 초청인사도 줄여 외형보다는 본질적 의미를 살리자.
가정의 행사도 의미를 살리고 내실을 다지자.
필자는 작은 결혼식을 주장한 바 있다(기독교보 2013.1.23) 혼수 예단 예식비용 등으로 힘들어 하는 결혼문화는 교회가 앞장 서서 속히 바꿔야 한다.
장례식도 간소하게 하자. 위로하고 위로 받는 것은 좋으나 규모가 과하지는 않은지 살펴 봐야 한다. 부고의 범위도 적당하게 줄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꼭 북적대어야 위로가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돌 잔치도 소박하게 하자. 필자는 입양운동을 하는 관계로 돌잔치에 비교적 많이 가는 편이다. 입양아의 돌잔치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축복하고 감사예배도 인도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돌잔치에 참석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울 때가 종종 있다. 돌잔치의 화려함과 소란함 때문이다. 어린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축하하는 모임인데, 지나치게 상업적인 이벤트와 규모, 비용에 뒤처져 돌잔치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저출산 사회이니 돌을 맞이하는 아이 가족들의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는 가지만 의미를 살려 간소하게 하면 좋겠다.
작금의 가정 의례 또는 가정 행사의 과소비 허례허식 풍조는 그 중심 세대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는 않는다. 혼주 또는 상주가 되는 50-60대는 자수성가한 세대, 힘든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살림을 일구고 가정을 세우고 나라를 이르킨 세대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자연스레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룬 업적에 대해서 일가친척과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보이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돌잔치의 중심인 엑스세대에게는 또 다른 문화적인 배경도 있고, 부추기는 이벤트 회사의 유혹도 있다. 한국교회의 중심세대도 성장 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외형적이고 과시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세상을 변혁시켜야 할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교회가 앞장 서서 고비용의 행사를 줄이고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허례허식을 버리고 의미를 살리고 내실을 다지자. 특히 주면서 부담을 느끼고 받으면서도 빚으로 여기게 되는 축의금, 부조금 문화를 바꾸면서 간소한 행사를 지향하자.
비록 능력이 있다고 고비용의 행사를 주도하고 외형적인 규모를 중시 여기게 된다면 가난한 이웃이 가지게 될 상대적인 박탈감과 불행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황금만능주의와 끝없는 욕망이 가져다 주는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 때문에 피해를 보고 좌절하는 다수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다름을 보인다면 큰 희망이 되지 않을까.
사도 바울은 가난한 이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았고(갈 2)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도 포기하고(고전 9) 많은 사람을 구하여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익도 구하지 않았다(고전 10) 혹 좀 덜 가진 이들은 자족의 믿음을 갖고(빌 4)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는 세속적인 문화를 배격하고 주님 앞에서 감사하고 다짐하는 의례문화를 만들자.
경제가 회두인 세상에서 “검소하게 살기” “간소하게 살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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