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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회-생명나무/2010년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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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0-09-19 20:47 조회4,2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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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회-생명나무/2010년10월호/
 
이 시대 작은 자들을 위한 목회

황수섭 목사(고신대학교 의과대학 교목)


하나님께서 많이 부족한 나를 목사로 세워 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것 특히 어릴 적부터 오직 목사의 꿈만 갖고 준비된 목사로 살게 하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주님을 위한 최고의 삶은 목사로서 헌신하는 것이라고 믿고 성장했고 어릴 때부터 장래 희망은 목사 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 누나들 틈에서 소꿉놀이를 할 때도 나의 역할은 기도하고 축도하는 목사였고 청소년 시절 별명 중 하나도 목사였다.

목사의 꿈을 가진 것은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첫째는 선친(황병집 장로, 안동남문교회)께서 자녀들 중 아들 하나는 주님의 종으로 바치고 싶어 하셨고, 항상 목사님을 최고로 생각하시면서 존경하신 모습과 어린 눈에 목사님들이 너무 멋지게 보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에도 들어 가기 전 어린 내가 선친의 손에 이끌려 간 교회에서 두루마기를 자주 입으셨던 고 장성도 목사님의 축도하시는 모습이 좋아서 흉내를 내었다. 이후 초등학교 때 고향교회에 오신 고 김종만 목사님은 목사의 꿈을 가진 나를 격려해 주셨을 뿐 아니라 신앙과 좋은 리더의 훈련을 시켜 주셨다. 고 김종만 목사님께서는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셨다. 1970년을 전후한 10여년 동안 안동남문교회 청소년들에게 주님을 위한 꿈을 심어 주시면서 헌신하여 신학을 공부할 것을 독려하셨는데 그 결과 김목사님의 영향으로 짧은 기간에 10여명의 청소년들이 목회자가 되었다.
목사로 살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으로서 가장 가치있는 삶 또는 나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생명 새 소망을 주신 주님을 위해서 한번 뿐인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은 목사라는 소명이었다. 그래서 교회생활, 크고 작은 수양회 등의 모임에서도 항상 내 생각은 목사로서의 삶이었다.

목사로서의 꿈은 아주 소박했었다. 목사가 되어 고향 근처의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청소년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었다. 신앙적인 환경의 영향이 컸었던 같다. 담임목사이신 고 김종만 목사님, 안동 시외에 위치한 교회에서 목회하셨던 고 이맹희 목사님, 이춘화 전도사님과 목회 현장에서 은퇴하셨지만 조정용 목사님, 엄칠문 목사님(두분은 당시 중고등부 부장 집사님이셨음) 이런 분들의 목회 모습과 교회 청소년들의 신앙 교육 현장에서 헌신 하시는 모습들이 존경스러웠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목사의 꿈을 꾸고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고려신학대학에 입학을 하여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 준비 기간에도 주님의 은혜가 컸다. 대학 2학년 시절부터 가덕도 대항교회에서 혼자서 목회 아닌 목회를 하였다. 주일 예배 설교, 유초등부, 중고등부, 심방 등등 혼자서 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 같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부교역자로 지낼 때도 담임목사님들은 좋은 본으로 가르침을 주셨다. 교인에 대한 애정, 한번씩 하는 설교도 마치 시험치듯이 준비하게 하셔서 좋은 설교를 하도록 하셨고 여유와 즐기는 목회 등을 배웠다. 그 목사님들은 나의 좋은 스승이셨다.

지금 나의 목회는 특별하다. 교회목회가 아니고 기관 목사로서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의 교목으로 목회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아시는 분들은, ‘황목사 목회 안하냐? 빨리 목회를 해야지.’ 심지어는 신학교 교수님 조차도, ‘황목사는 목회 안하세요?’ 친구들도 ‘황목사 젊은이들과 지내니 좋지? 그래도 목회해야 된다.’ 지금 교단 기관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교단이 운영하는 대학의 교목으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돌아 보니 목사 수련 기간부터 지금까지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목회하고 있다.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청소년 목회 현장에 있었다. 교회 중고등부 학생신앙운동(SFC)의 알돌로서 활동을 하다가 경안노회가 경북노회로부터 분립되면서 경안지방 SFC가 되니 자연스럽게 지방SFC 위원장, 전국SFC 부위원장이 되어 청소년 사역 현장 속에 들어 서게 되고, 그렇다 보니 신학교 시절 교회 봉사 기간에도 청소년들과 지내었고, 강도사 기간에는 부산지역 SFC 간사로서 사역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의 교목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

젊은이를 위한 목회를 하면 보람이 있다.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헌신하고 헌신하면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니 보람이 있다. 교단이 설립한 대학이니 개혁주의 정신을 가진 기독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복음과 더불어 기독교 관점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복지 가정 등을 보고 성숙한 기독 의료인으로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니 참 감사하고, 의료선교인 양성이라는 특별한 설립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매년 의료선교 훈련을 실시하면서 젊은이들이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선교현장을 경험하고 헌신을 다짐하게 되니 목회의 보람이 크다.

기관목회를 하니 주말과 휴일이 자유롭지만 고신의대 교목 초기에는 목사가 주말과 휴일에 여유를 부려서 오히려 심적 부담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의미있게 활용할 일거리를 주셨다. 두딸(아름 다운)을 낳아서 기르던 우리 가정에 쌍둥이 아들(대한 민국)을 입양하게 하시고 남다른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입양의 행복 중 가장 큰 것은 아내의 일상이었다. 15년 전 4년의 개척교회를 접고 고신의대 교목 사역을 시작할 때 아내가 힘들어 했었다. 학교 근처에 위치한 집이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오는 학생들을 대접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교목의 아내로서는 별다른 역할이 없었으니 자아 실현감 성취감을 못 느꼈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내가 부모가 필요한 쌍둥이 아들을 입양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양육하니 아내가 생기를 얻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가 중심이 되는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한 입양운동을 하게 하셨다. 주말과 휴일에 전국을 다니면서 입양운동을 하고 수많은 가정이 입양을 하는 성과도 맛보았다. 또 입양운동을 하다가 해체가정 아이들, 보육시설, 장애시설, 미혼모 시설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들 속에서 주님의 모습 주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 주말과 휴일을 도움이 필요한 이 시대의 지극히 작은 자들인 그들을 위해서 봉사하며 후원하며 지내게 되었다. 어떤 때는 주말과 휴일에 피로감을 더 많이 느낄 정도로 바쁜 일들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몸은 피곤하고 바쁘지만 목사인 나를 이렇게 특별하게 써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정말 감사하며 활동한다. 특히 엄마가 일찍 돌아 가셔서 엄마 없는 서러움과 가난의 상처를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하시고 이제는 그런 아픔이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며 그들을 위한 봉사와 복지운동을 한다는 것이 보람있고 감사하다.

나는 남다른 경험이 있다. 일찍 목사의 꿈을 가졌고,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돌아 가시는 아픔이 있었지만 가족과 교회공동체와 목사님으로 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 복음으로 치유되었고, SFC를 통해서 신앙훈련 뿐 아니라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훈련, 네트워킹을 하는 훈련받고 일찍부터 리더로 세움을 받은 것은 좋은 경험이다. 치유받은 상처, 훈련된 리더로서 앞으로 국내입양활성화, 입양 가정을 위한 치유 사역, 복지가 필요한 이 시대 작은 자들을 위한 기독교 복지운동을 하면서 목사로서 살아 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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